대한황실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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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han Imperial Household

경기전(慶基殿)

<전주 경기전 정전[全州 慶基殿 正殿]>

경기전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묘사(廟祠)로 조선 태조고황제 이성계(李成桂)의 어진을 모신 건물입니다.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 사적 339호로 승격됐고 2008년 12월 1일 대한민국보물 제1578호로 지정됐습니다.

역사

전주는 전주이씨 조선왕실의 본관지로 조선건국 후 조정으로부터 우대받았습니다. 태종(太宗)10년(1410)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져 태조고황제의 어진을 봉안하게 됐습니다. 전주 외에도 계림과 평양에도 어용전을 세워 태조고황제의 어진을 봉안했는데 세종(世宗)24년(1442) 전주 어용전을 경기전으로 개칭하면서 각지의 어용전 이름들도 경기전으로 개칭했습니다.

<대한민국국보 제317호인 경기전 태조고황제 어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光海君)6년(1614) 중건됐는데 이때 경기전에 봉안돼 있던 태조고황제의 어진을 경기전 참봉 오희길이 손홍록 등과 함께 빼내 전주사고실록(全州史庫實錄)과 함께 내장산에 숨겼고 전쟁 후 다시 조정에 바쳐 경기전에 봉안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때는 전주의 판관 민영승(閔泳昇)에 의해 조경묘의 위패와 함께 위봉산성으로 일시 옮겨지기도 했습니다. 이때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정의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이 4월 28일 전주 남쪽 봉우리에서 전주성 안을 향해 대포를 쏘는 와중에 경기전 경내까지 대포가 날아들어 건물의 처마가 부서지고 조경단이 파손되자 당시 전주를 점령하고 있던 농민군의 지도자였던 접주 전봉준(全琫準)은 초토사 홍계훈에게 보내는 소지문(訴志文)에서 “전주감영에 대포 쏜 것이 저희 죄라고는 하지마는 성주를 시켜 대포를 쏘아 경기전을 무너뜨린 것은 옳으며, 군대를 동원해서 문죄를 한다면서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 것은 옳습니까?”라며 이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Cf. 김삼웅 《녹두 전봉준 평전》 시대의창, 2007년).

조선조정은 경기전의 태조고황제의 어진을 모본으로 다시 어진을 모사했습니다. 숙종(肅宗)14년(1688) 모사를 위해 서울로 이안(移安)했다가 전주로 돌려보냈으며 서울에서 새로 모사된 태조고황제의 어진은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봉안됐고 고종(高宗)9년(1872) 경기전의 어진이 낡자 영희전의 어진을 모본으로 다시 어진을 모사하여 경기전에 봉안하게 했습니다.

일제시대 경기전은 이왕직(李王職)에 속했는데 전주이씨에 한해서만 참배가 허락됐습니다(Cf. 동아일보 1934년 10월3일자). 경기전은 1971년 전라북도유형문화재 2호로 지정됐고 1990년부터 70억 원의 예산이 투입돼 경기전 서쪽 중앙국민학교(현 전주중앙초등학교)를 성심여중고 부지로 이전했고 해당 부지에 사고, 전사청, 시위청, 수문장청 등을 복원했습니다.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사적 제339호로 2008년 12월 1일 보물 제1578호로 승격 지정됐습니다.

건축

<경기전 내부>

일제시대 경기전 서쪽부지와 부속건물이 철거되어 일본인소학교가 세워져 절반이상이 잘려 나가면서 경기전 본관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外三門)과 내삼문(內三門)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로 변형되고 말았습니다(Cf. 이병천, 채병선, 최상철 저, 《전주한옥마을》, 대원사, 2013).

경내에는 태조고황제의 어진을 모신 본전과 전주이씨 시조로 전해지는 신라시대 사공공 이한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대왕의 탯줄을 묻은 태실 등이 있습니다.

<전주사고 실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