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모음

[한국타임즈 역사기획칼럼(2)] 대한제국 13년…② 부국강병만이 살 길이다

Imperialhouse 0 755
[한국타임즈 최창수 기자] 도서출판 '정담은출판사' 탄생을 기념해 '6종-30회'의 역사기획칼럼을 연재하고자 한다. 역사기록에는 정사(正史)와 야사(野史)가 있다지만 이 칼럼은 단순한 사견(私見)에 불과하다는 것을 조심스레 밝히면서 - ① 대한제국 그리고 대한민국 ② 우중문, 참 가련하다 ③ 신(新) 징비록 ④ 백제의 마지막 전투 백강국제해전 ⑤ 한일수교 51주년을 맞아 ⑥ 훈민정음해례본이 국보1호다 - 를 소개하고자 한다.

1. 고종의 환궁, 새로운 시대 예고
 
고종은 1896년 4월 창간하는 독립신문의 창간비용을 전액 지원하는 등 자주독립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방한다. 독립협회 또한 고종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조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일환으로 고종은 새로운 결심을 하게 하면서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으로 돌아온다. 고종의 환궁은 국민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음이다.

환궁 직후인 1897년 봄부터 전국의 유생들과 각계각층에서 고종의 칭호를 높여야 황제의 존호를 사용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친다. 이는 고종이 계획한 것이었다. 그해 10월 고종은 마침내 황제 칭호의 사용을 허락한다. 제국을 선포하고 부국강병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스스로 황제에 오름으로써 세계만방에 자주독립의 의지를 선언하려 한 것이리라.
 
2. 대한제국 선포, 자주독립 선언
 
고종은 황제 즉위식 장소로 제천의식을 올리던 환구단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열강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당시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의 기록에 따르면 러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가 조선의 황제국 선언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조선의 황제국과 지주독립 선언은 조선에서 이권을 쟁취하려는 그들의 야욕을 잠재우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897년 10월 12일. 문무백관과 수많은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종의 황제 즉위식이 거행됐다. 하늘의 뜻을 받들었던 환구단에서 황제 탄생을 알리는 제천의식이 치러지고, 고종은 조선 최초의 황제로써 당당히 즉위단에 올랐다. 황제국을 선언한 조선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각국 공사들도 황제가 된 고종 앞에 머리를 숙였다.
 
3. 근대화를 향한 변화 주도
 
을미사변 이후 미뤄왔던 명성황후의 국장도 성대하게 치러졌다. 사대주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명실상부한 자주독립국으로서 대한제국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독립문은 독립협회에서 세운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실질적으로 건축을 주도한 주체는 대한제국 정부였다. 독립문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 의지를 담은 상징물인 것이다.

이렇게 대내외적으로 자주독립국임을 천명하면서 세계열강들 사이에서 대한제국의 위상이 크게 달라진다. 러시아와 일본은 황제칙서에 대한제국황제라는 존호를 사용하였고, 영국은 주한조선영사를 대한제국공사로 승격시킴으로써 대한제국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실제로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근대화를 향한 많은 변화를 주도적으로 시작한다.
 
4. 수도 한성의 도시개조사업
 
수도인 한성의 도시개조사업이 시작된다. 이는 황제국 위상에 걸맞게 수도 한성을 근대적인 도시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가장 먼저 근대 도시에 맞게 도로를 확충한다. 도시개조는 도로를 들여다보는 것이 효율적이다. 덕수궁 앞 도로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소공로가 신축되고 주변 도로 방사성으로 확장되면서 황궁을 중심으로 개조사업이 이뤄진다.

한성의 또 다른 변화는 공원 건설이었다. 당시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이 그린 지도를 보면, 종로 한 복판에 공원이 표시되어 있다. 종로 1가의 탑골공원이다. 대한제국 이전의 조선에는 공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당시 탑골공원 부지는 원각사지 10층석탑 주변으로 주택가가 둘러서 있었다. 대한제국 설립 직후 주택가를 허물고 공원을 세운 것이다.
 
5. 아시아 최초로 전차 개통
 
한성에서 일어난 가장 놀라운 변화는 전기의 도입이다. 1899년 5월, 한성에  아시아 최초로 전차가 개통되었는데, 당시 전차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힘든 것이었다. 내국인은 물론 주한 외국인 사이에서도 전차는 큰 화제를 모았다. 동대문에서 종로까지 운행하던 전차는 전차 타기를 즐기다 가산을 탕진한다는 유행어를 만들어 내면서 노선이 계속 증가되었다.

주한 이탈리아 대사였던 까를로 로제티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한성에 도착한 여행자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것은 전차였다. 완벽하게 관리된 전차는 한성 주변의 성 외곽가지 연결되고 있다. 전차로 인해 한성은 근대적 교통수단을 갖춘 극동 최초의 도시라는 명예를 얻었다” 전차이용률이 높아지고 발전소도 건설돼 전기가 남을 지경이었다.
 
6. 극동의 가장 깨끗한 도시 한성
 
한성전기회사는 남는 전기를 이용해 도심의 가로등 사업을 전개했다. 종로에서 시작된 가로등 사업은 한성의 밤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도시개조사업은 불과 3년 만에 한성을 근대도시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한국과 그 이웃사람들’의 저자 비숍은 “이전까지는 가장 지저분한 도시였던 서울이 이제는 극동의 가장 깨끗한 도시로 변모해가고 있는 중이다”

대한제국의 도시개조사업은 자력으로도 얼마든지 황제국에 어울리는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도심을 수놓은 가로등과 그 앞을 지나는 전차는 참 인상적이다. 당시 첨단 문명의 상징이었으며, 서양에서도 흔치 않았던 전차를 아시아 최초로 도입한 나라가 바로 대한제국이었다는 것이 놀랍다. 일본의 동경보다 무려 3년을 앞선다.
 
7. 대한제국 선포 이후의 놀라운 변화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변화가 대한제국 선포 이후 불과 3년 만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자문이나 기술이 충분하지 않았던 당시로선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한제국의 근대화가 이렇게 급속도로 진행된 것은 고종황제의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 했던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는 보다 내실 있는 계획을 내놓는다.

서울의 대표적인 번화가중 하나인 소공동이 은행과 주요 관공서, 기업체 등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 또한 대한제국 때였다. 1894년까지 불과 5개에 불과했던 기업 수는 1904년 222개로 증가한다. 이러한 변화는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킨다는 식산흥업정책으로 실업학교를 설립하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자력으로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노력이었다. (계속 이어집니다)

* 최창수 한국타임즈 수도권취재본부 총괄본부장은 '한국기독교 사형폐지운동연합회 수석운영위원' '뉴스나비 논설위원' '도서출판 정담은출판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타임즈 최창수 기자

 

Comments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
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네이버밴드에 공유